에린(Erin)이라는 다른 토종 테리어들과 그를 구별하기 위해 과거에 아이리쉬 랜드 테리어라고 불렸던 이 품종을 아일랜드산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개들은 수세기 동안 알려졌고, 적은 가축을 가진 영세한 아일랜드 농부들에게만 가치가 있었다. 쥐를 잡는 전문 기술이 긴박하게 필요하지 않은 귀족들의 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개들에 대한 문서적 기록은 별로 많지 않다. 이 품종은 "퇴비더미의 개"로서 브레혼 법률(처음에 구두로 통과된 후 중세 초기에 기록된 최초의 아일랜드 법률)에 묘사적으로 언급되었다. 퇴비더미는 농장 마당에 당연히 있었으며, 쥐들이 번식하는 본거지였다.
개 전문가인 스톤헨지(J.H 웰쉬)는 1887년 글에서 아이리쉬 테리어가 옛날 스코티쉬 테리어와는 구별된 것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며 "본래 영국산이 아닌 모든 것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뚜렷하다. 수 세기 전 아일랜드인이 쳐들어가 스코틀랜드에 그 원형을 소개했다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 또는 기원전 4세기에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모두 정복한 켈트족들이 원형적인 테리어를 데리고 들어간 후, 차이가 증대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초기 역사가 어떻든 1800년대 중엽까지 검정/갈색과 얼룩은 물론이고, 보다 바람직한 붉은색을 한 아일랜드 산 테리어는 흔한 것이었다. 몇 년 동안 많은 이 품종은, 그들이 투견으로 쓰였다는 확실한 표시인 끝이 잘린 귀를 하고 있었다. 아일랜드산 테리어의 강타하는 턱은 많은 아일랜드 쥐들의 종말을 예고한다. 그러나 해로운 것들을 박멸하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드러운 입을 가진 리트리버가 될 수 있었고, 종종 쥐잡이와 사냥꾼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하였다. 1875년 아일랜드 쇼에서 그 품종이 처음 나타났을 때, 여전히 크기와 형태가 다양했다. 그 대회를 활보하던 50마리의 개 중에서 출전한 것은 9파운드 이하로 분류된 몇 마리와, 케언 종들을 이긴 많은 개들에 대항하여 경쟁한 순백의 참가자로 30파운드 이상인 것 한 마리였다. 개들이 참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순종이어야 한다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런 변이들이 존재했다. "어떠한 사항에도 이용할 수 있는 양육 정보"가 부록에 많이 게재되어 있었다. 이름이 "박서"인 우승개는 혈통이 알려지지 않았으면서도 주인에 의해 길러졌다고 뻔뻔스럽게 알려졌다.
이런 엄청난 혼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강력한 애견클럽의 형성을 부흥시켰다.
그 세기 말까지, 붉은 색의 개들만 승인되어 형태가 잘 표준화되었고, 귀를 자르는 것(싸우기 위해)은 금지되었다. 이 품종의 명성은 아일랜드산 테리어들이 배달개로 이용되던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얻게 되었다. 소란함과 혼란함은 겁이 없는 아이리쉬 테리어에게 방해되지 않았으며, 많은 병사들이 자기의 생명을 이 개들에게 신세졌다.
여우사냥 테리어보다 더 크고 더 발랄한 개인 아이리쉬는, 아직도 풍부한 뼈와 살을 갖고 있다. 사람들에게 잘 단련되고 다정다감하며 충성스러운 그 품종은 성격이 불같고, 활기가 있으며, 무모하다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부주의하고 분별없는 용기"를 보인다. 이 개들은 매력을 발산시키며, 그들의 거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는 내부의 따스함을 잘 못 나타낸다. 그들은 특히 아이들과 잘 지내며 "어린아이들의 개"라고 전해진다. 작가인 멍거필드와 호웰은 그들의 「개백과」에서 "성장하는 소년은 같이 자랄 더 좋은 친구를 바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악영향이 다른 사람에 의해 확실히 활용될 한 사람에 의해 감시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아이리쉬 종은 19세기에 축견클럽(kC)의 승인을 받은 아일랜드의 첫 토종 테리어였으며, 그때부터 세계적인 인정을 받아왔다.